오늘 오후 4시 30분에 영등포 CGV 스타리움 가서 봤습니다. 개인적으론 가장 뒷자리 중앙이 아니면 비추입니다. 너무 스크린이 커서 눈에 안들어와요. 중앙 약간 우측이었는데 화면 50퍼 보면 잘본겁니다. 자막 보면 화면을 못 볼 정도.
크게 2개로 나눠둡니다. 스포일러 없는 간단한 내용과, 스포일러 잔뜩 들어간 자세한 내용으로 말이죠.
1. TV 판의 찝찝한 인간관계를 기대하지는 말 것. 인간관계가 꽤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캐릭터들의 갈등이 꽤 단순해졌습니다.
2. 연출은 매우 훌륭합니다. 3D 와 2D 의 부조화도 없고, 동화 역시 아낌없이 사용됐습니다. 중반이 굉장히 조용해서 '서' 가 지겨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번에는 그럴 기회가 없을 겁니다. 별로 긴 상영시간도 아닌데, 쉴새없이 사도가 튀어나옵니다. 다만 약간의 작붕이 보이는군요.
3. 신캐릭터 마리는 2000년대 캐릭터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신 적어도 파에 나온 것만 본다면 내면과 외면의 갈등이 있을 거 같지는 않군요. TV 판의 카오루처럼 말입니다. 성격 자체는 물론 카오루와는 많이 다릅니다. 근데 이번 파에서는 비중이 좀....
4. 서비스신 꽤 됩니다. 특히 서에 비해 아주 비약적으로 상승. 의도적으로 앵글 잡은 것이 꽤 많습니다. 특히 아스카의 서비스가 상당히 많으니 아스카 팬들은 상당히 좋아하실지도.
5. TV 판을 본 사람이면, 아니 정확히는 이전의 극장판인 엔드 오브 에바를 본 사람이면, 이번 극장판 '파' 의 전체 내용은 프롤로그이고, 진짜 내용은 스텝 롤 이후에 있습니다. 즉,
스텝롤 이후 내용 놓치면 '파' 안본거임!
이제부터는 좀 더 자세한 내용입니다. 물론 스포일러 잔뜩. 2009년 12월 5일 내용 추가됐습니다.
1. '서' 편에서 이미 기미가 보였던 신지의 바뀐 성격은 이번편에서 여지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도시락 싸주면서 이야기 일일이 다 걸어준다든가, 후반부에 보여주는 레이를 구하기 위하여 피와 살이 찢겨 나가도 들이대는 거라든가. 물론 신지 뿐만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도 달라진 편입니다. 신지에게 나름 신경써 주는 겐도의 경우도 그렇고, 레이의 행동은 거의 유이, 즉 겐도의 아내이자 신지의 어머니의 역할을 하려고 하고 있고... 많은 캐릭터들이 직접적인 접근을 통해 감정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여럿 나타납니다.
이 때문에 TV 판에서 나타났던 인간적인 찝찝한 갈등 부분들이 상당히 단조로워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물론 극장판에서 TV 판같은 방식을 취했다간 '서' 에서처럼 졸려요 이런 이야기가 나올 테니 어쩔 수 없긴 하겠지만, 솔직히 이렇게 되면 이야기 전개 방식 자체를 놓고 봤을 때 다른 로봇 애니와 얼마나 차이가 있는거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에바에서 캐릭터들이 매력있었던 건, 그 컴플렉스 덩어리의 캐릭터들이 얽혀가며 답이 나오지 않는 인간관계를 만들어내면서였던 거였거든요. 엔드 오브 에바의 마지막에서 신지와 아스카 둘만이 남았을 때 조차도 서로 갈등하던 것처럼 말입니다.
2. 1을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만, 캐릭터들의 성격이나 배경이 대화나 연출을 통해 훨씬 직접적으로 나타납니다. 신 캐릭터 마리같은 경우는 원래 성격이 그런건지 너무 주절댄다(라고 쓰고 설명한다고 읽습니다) 생각될 정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레이와 1호기의 경우로, 대놓고 유이의 연장선 기운을 풍기고 있습니다. 초반 신지의 독백으로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했고, 겐도와 레이의 식사장면에서도 레이의 얼굴을 유이에 대입시키는 등 상당히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뭐 에바에서 레이와 1호기가 유이랑 연결되고 신지와 겐도가 여기에 얽히는 과정은 흔히 잘 알려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나 그외 몇 가지에서 잘 알려져 있으니 여기서는 따로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3. 신 캐릭터 마리는, 카오루와 같은 역할의 여성 캐릭터로서의 느낌입니다. 카지의 독백에 정면으로 대응되는 마리의 독백 ('내 계획에 어른들을 이용해 먹다니... 어쩌구 저쩌구..') 부터 시작하여, 적어도 파 내에서는 내면적 성격과 외면적 성격의 왜곡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행동하고 있죠.
전투에서 얻게 되는 통증과 부상마저도 재미있으니 괜찮다고 할 정도고, 싸우려면 이정도 폭주는... 이라고 할 정도로 자신이 싸우는 데에 본능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블랙라군에서 나오는 여자 캐릭터들을 표현할 때 쓰는 '망가졌다' 는 의미가 조금 적용되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2000년대 스타일의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다만 예상 외로 '파' 에서 그녀가 가지는 비중은 그렇게 높지 않은 편입니다.
4. 일단 내용은, TV 판 및 엔드 오브 에바의 주요 부분들을 가져왔지만 내용 전체는 완전히 뒤바뀐 구조입니다. 토오루가 하던 역할을 아스카가 대신했고, 덕분에 마리의 등장으로 애매해질 듯한 캐릭터간의 역할 배분이 적절히 다시 이루어졌습니다. (만약 마리까지 있는 상황에서 토오루까지 끼어들어갔다면 아스카의 역할은 진짜 엄청 얇아졌을 겁니다)
하지만 앞부분의 일상 내용이 너무 짧아서, 이번 작에서 새로 등장하는 아스카의 행동이 상당히 뜬금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3인이 힘합쳐서 사도 쓰러트린 사건 하나로 고독을 느낀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바로 신지 침대에 껴자는 이벤트(TV 판의 그 이벤트와 같은 형태입니다) 까지 이어지기엔 극장판 본편만으로는 설득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TV 판을 본 사람들이야 이해를 하겠지만요. 그나마 다행한 점은, 위의 사건을 만들어내는 계기인, 레이의 식사 초대에서 겐도와 신지를 만나게 하기 위해 아스카가 4호기 테스트를 맡는다는 상황이 신지에게 책임감을 더 부여해 주고, 덕분에 이러한 허점을 잘 메꿔주었다는 점입니다.
5. 이번 극장판의 가장 큰 충격은 뭐니뭐니해도 스텝롤 이후의 장면입니다.
사실 스텝롤 전에 피부를 다 녹이는 고통을 이겨내고 신지의 레이를 바라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레이와 하나가 되어 서드 임팩트가 일어나기 시작한 시점까지만 해도, 아 엔드 오브 에바와는 다른 선택의 연장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나보구나 정도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롱기누스의 창을 꽂아버리고 등장한 카오루의 말, "이번에는 신지 너를 꼭 행복하게 해줄께." - 대충 이렇습니다. 전 기억력이 엉망이라 -.-
즉, 이것은 엔드오브에바의 루프버전에 가까운 시나리오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면에서야 비로소 왜 TV 판과는 달리 바다가 빨간색인 것인가와 같은 설정에 대한 설명부터 (엔드오브 에바에서 서드 임팩트가 일어나고 온통 바다가 핏빛에 물들죠) TV 판과는 판이하게 다른 스토리 구조에 대한 정당성까지, 에바 서에서부터 시작된 모든 의문들이 한번에 풀리게 된 셈이죠. 하지만 대신에, 그럼 왜 이들은 엔드오브 에바의 사건을 모르고 있는 것인가, 사도는 왜 또 나오는 것인가 등등, 풀린 의문 이상의 산더미같은 의문들이 다시 떠오게 됩니다.
게다가 롱기누스의 창으로 신지와 레이가 동화된 (즉 엔드오브 에바에서 레이와의 결합을 거부했을 때와는 다른 선택이 됩니다) 존재를 한 방에 동결시켜 버림으로써, 다음편이 Q 에서 신지와 레이는 적어도 한동안 나오지 않을 것임을 암시합니다. 결과적으로 다른 캐릭터들이 주역이 되는 상황이 됨으로써 이후 시나리오는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올 것이라는 점을 알려주게 되죠. 이 때문에 저는 적어도 서를 보고 난 후 파를 기대하던 때보다, 지금 Q 를 기대하는 것이 훨씬 큰 상황입니다.
6. 그 전투 연출 중 나오는 두 개의 잔잔한 노래는 솔직히 좀 에러라는 생각이 듭니다. TV 판에서도 언밸런스한 곡들의 연출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그런 언밸런스 자체가 당시 에바의 분위기 - 즉 모순덩이들로 뭉친 캐릭터들과 씁슬한 현실 - 와 기막히게 잘 어울려서 와아 감탄사가 나오는 수준이었는데, 이번 노래는 좀.... 뭐 가사는 그럭저럭 역설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쳐도, 노래 자체는 어떻게 답이 안나오더군요.
뭐가 문제가 되어서 이런 느낌이 드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곰곰히 생각해 보지는 않았는데, 아무튼 뭔가 정말 맞질 않았습니다. 다만 이번 편의 직설적인 캐릭터들에 의해, 나타나는 사건들마저 직접적인 감정연출이 많이 나타나다 보니 그런 문제가 발생한 것도 아닌가 하는 가능성을 제시해 봅니다.
(1205 추가) 7. 겐도의 마지막 대화를 보아, 적어도 신지와 레이의 동화는 그의 예측 범위 내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겐도가 신지에게 또 도망치는 것이냐고 부추기는 것도, 이번 극장판 구도 내에서는 신지의 행동을 통하여 제레가 원하는 서드 임팩트가 아닌 겐도와 후유츠키가 원하던 서드 임팩트의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레이와의 융합 이전에 기회가 한 번 있었죠. 바로 아스카와 4호기 사건 때입니다. 다만 레이의 경우, 시나리오의 키가 되는 유이와의 연관성이 존재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 아스카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저도 아직 확신할 수 없습니다.
X. 결론.
TV 판의 인간관계와 갈등구조에 비하면 많이 밋밋한 탓에 아쉬운 점이 많았으나, 스텝롤 이후 한 방의 장면으로 그런 것들을 납득하게 만듬과 동시에 다음편의 내용을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뭐 안노 히데야키는 연출 자체만으로도 최고 수준임에 틀림없지만, 사람 낚는 솜씨 역시 당해낼 자가 없는 듯 합니다. 다만 그 노래는 좀...
P.S 후 이대로면 한번은 더 봐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