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ernal Dream - 0. 꿈의 반대편에서 - 밀리어 홀리워터 편 - 3
까페테리아마저도 답답한 벽면으로 가득 채우기에는 너무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아니면 아만 사가 자신들의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높이만으로도 몇 미터나 되는 한쪽 벽면 전체가 모두 입체 디스플레이로 채워져 있었다. 디스플레이와 동일한 크기로 구성된 카메라로부터 빛을 다양한 각도로 입력받아 입체적인 출력이 가능한 화소를 이용해 출력한다는 이 물건은 처음부터 디스플레이가 유리창이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고, 그 때문에 창문이 되었더라면 살풍경한 공사 지역을 비추어야 할 벽면은, 비록 색이 바랬지만 아직도 나름대로의 빛을 비추고 있는 지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참 긴 시간이었습니다. 변화된 지구의 모습으로 보나 우리들 모습으로 보나 말이지요."
디스플레이 한 켠을 장식하고 있는 색 바랜 지구의 모습을 편안한 눈동자로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시선을 라인리히에게 돌리며 입을 열었다.
"예. 지구도 그렇고 저 자신도 그렇고,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속일 수 없군요."
세월은 잔혹하고 그만치 너그러운 것일까. 라인리히는 자신의 젊음을 가져간 시간이, 이렇게 리하르트와 얼굴을 마주 대하고 앉아 있을 수 있도록 서로간에 쌓인 감정을 같이 가져가 버렸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둘 사이에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찻잔에 놓인 차가 둘 사이에 흘러가는 시간을 말해주듯 천천히 식어 가고 있었다.
“박사님께서 절 보실 용건이 있다고 하셨죠? 아마도 그것이 제가 박사님을 만나 뵈어야 할 이유와 마찬가지가 될 것 같습니다.”
리하르트의 말대로라면, 자신의 질문이 결국 그가 자신에게 바라는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찻잔의 손잡이에 손가락만을 끼고 프림 섞인 커피의 탁한 기운을 바라보고만 있던 라인리히는 비로소 마음을 잡고 입을 열기로 결정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괜찮은 겁니까?"
리하르트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라인리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라인리히는 그의 눈이 부드러움에서 단호함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눈빛과는 달리 그는 보일 듯 말 듯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예. 아니 어찌 보면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라인리히는 그 대답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지 한동안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만 했다. 시선을 천천히 찻잔으로 떨구며 침묵을 지키는 그를 한동안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다시금 입을 열어 자신의 말을 보충했다.
“놀랍게도 인류에게는 아직 기회가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뭐 지금 제 심정도 그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만.”
라인리히는 생각 외의 말을 듣고서 다시 고개를 들어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옅은 미소를 띈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은 아직 우리를 저버리지 않은 모양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신 커다란 시험을 남겨 주셨더군요.”
말을 마친 리하르트는 시선을 찻잔에 향하고선 찻숟가락을 들어 홍차 안에 천천히 담그었다. 약한 파문이 아주 잠시간 찻잔을 맴돌려 할 때 그는 천천히 차를 젓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맑은 홍차가 찻숟가락을 따라 물결을 만들어내었다.
“결국 그만 둘 수는 없었다는 이야기이군요.”
라인리히는 첫 말을 듣고서 약간의 기대감을 가졌던 자신이 너무 성급했음에 후회했다. 하지만 현재 자신이 결론내린 것이 사실이라기에는 그 첫 마디가 마음속에 걸렸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리하르트의 대답을 통해 긍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 되었다.
“아닙니다.”
리하르트는 찻숟가락을 꺼내 찻잔 옆에 둔 후 시선을 다시 라인리히에게 향했다.
“단지… 제가 너무 주사위를 빨리 던졌던 탓인지, 다시 집어 올 수가 없었습니다.”
허탈한 웃음이 리하르트의 얼굴에 번져 갔다. 상황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라인리히는 그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는 이해했지만, 실제로 무슨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어려웠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이라면,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두 가지 미래에 대한 결론 모두가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습니까.”
라인리히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최악의 결론으로 치닫지는 않는 듯 싶었지만, 대신 더욱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라인리히는 찻잔을 들어 차를 천천히 들이켰다.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혀는 프림이 섞인 커피임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맛만을 전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대신 약간의 선물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라인리히가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 하는 동안 리하르트 역시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약간의 차 맛만을 음미한 채 찻잔을 내려놓은 리하르트의 입에서 의외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녀를 위해서 말이지요.”
밀리어. 그와 자신의 사이에서 그녀라면 잊을 수 없는 이름, 밀리어 홀리워터.
아직 찻잔을 놓지 않았던 리하르트는 달그락 소리를 내며 찻잔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박사님을 위한 선물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우리 모두의 선물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후회할 수 밖에 없었던 시절. 후회할 수 밖에 없었던 행동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관계.
“박사님과 저, 그리고 밀리어가 이 시대가 아닌 약간이라도 다른 시대 사람이었다면, 이러한 운명으로 마주치지 않았을 텐데… 운명은 언제나 잔혹한 것을 요구하는 모양입니다.”
리하르트의 말은 라인리히의 마음 속 깊이 파고들었다.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면, 그리고 정말 인류에게 닥친 이러한 대사건이 있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조금이나마 셋의 관계를 돌이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인간 관계에 있어서 잠시나마 ‘행복’ 이라는 것을 맛볼 수 있었을 터이고.
라인리히는 아직도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자신과 밀리어에게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시야를 넓게 볼 수 있었더라면 밀리어는 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을 깨달은 것은 리하르트가 자신보다 조금 먼저 밀리어의 곁을 떠난 것을 보고서였다.
“밀리어를 부탁드립니다.”
리하르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말은 간단히 끝났지만 라인리히의 가슴에는 매우 무겁게 떨구어졌다. 결국 자신은 과거의 일을 해결짓지 못한 채 다시금 이 자리에서 무거운 책임을 떠 맡은 것이다. 원래는 그가 짊어졌어야 정말로 그에게 행복했을 일을.
리하르트가 차 값을 계산하고 카운터를 떠나갈 때 즈음, 라인리히는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리하르트를 불렀다.
“아이젠슈타인 박사.”
리하르트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라인리히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 있다고 할 지라도…”
라인리히는 조용하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 부탁은 반드시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리하르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을 지닌 표정이 떠올랐다. 라인리히는 그 표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 또한 그러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박사님을 믿겠습니다. 아니, 사실 제가 믿을 필요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리하르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여 까페테리아를 나갔다.
까페테리아마저도 답답한 벽면으로 가득 채우기에는 너무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아니면 아만 사가 자신들의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높이만으로도 몇 미터나 되는 한쪽 벽면 전체가 모두 입체 디스플레이로 채워져 있었다. 디스플레이와 동일한 크기로 구성된 카메라로부터 빛을 다양한 각도로 입력받아 입체적인 출력이 가능한 화소를 이용해 출력한다는 이 물건은 처음부터 디스플레이가 유리창이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고, 그 때문에 창문이 되었더라면 살풍경한 공사 지역을 비추어야 할 벽면은, 비록 색이 바랬지만 아직도 나름대로의 빛을 비추고 있는 지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참 긴 시간이었습니다. 변화된 지구의 모습으로 보나 우리들 모습으로 보나 말이지요."
디스플레이 한 켠을 장식하고 있는 색 바랜 지구의 모습을 편안한 눈동자로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시선을 라인리히에게 돌리며 입을 열었다.
"예. 지구도 그렇고 저 자신도 그렇고,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속일 수 없군요."
세월은 잔혹하고 그만치 너그러운 것일까. 라인리히는 자신의 젊음을 가져간 시간이, 이렇게 리하르트와 얼굴을 마주 대하고 앉아 있을 수 있도록 서로간에 쌓인 감정을 같이 가져가 버렸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둘 사이에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찻잔에 놓인 차가 둘 사이에 흘러가는 시간을 말해주듯 천천히 식어 가고 있었다.
“박사님께서 절 보실 용건이 있다고 하셨죠? 아마도 그것이 제가 박사님을 만나 뵈어야 할 이유와 마찬가지가 될 것 같습니다.”
리하르트의 말대로라면, 자신의 질문이 결국 그가 자신에게 바라는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찻잔의 손잡이에 손가락만을 끼고 프림 섞인 커피의 탁한 기운을 바라보고만 있던 라인리히는 비로소 마음을 잡고 입을 열기로 결정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괜찮은 겁니까?"
리하르트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라인리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라인리히는 그의 눈이 부드러움에서 단호함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눈빛과는 달리 그는 보일 듯 말 듯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예. 아니 어찌 보면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라인리히는 그 대답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지 한동안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만 했다. 시선을 천천히 찻잔으로 떨구며 침묵을 지키는 그를 한동안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다시금 입을 열어 자신의 말을 보충했다.
“놀랍게도 인류에게는 아직 기회가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뭐 지금 제 심정도 그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만.”
라인리히는 생각 외의 말을 듣고서 다시 고개를 들어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옅은 미소를 띈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은 아직 우리를 저버리지 않은 모양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신 커다란 시험을 남겨 주셨더군요.”
말을 마친 리하르트는 시선을 찻잔에 향하고선 찻숟가락을 들어 홍차 안에 천천히 담그었다. 약한 파문이 아주 잠시간 찻잔을 맴돌려 할 때 그는 천천히 차를 젓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맑은 홍차가 찻숟가락을 따라 물결을 만들어내었다.
“결국 그만 둘 수는 없었다는 이야기이군요.”
라인리히는 첫 말을 듣고서 약간의 기대감을 가졌던 자신이 너무 성급했음에 후회했다. 하지만 현재 자신이 결론내린 것이 사실이라기에는 그 첫 마디가 마음속에 걸렸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리하르트의 대답을 통해 긍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 되었다.
“아닙니다.”
리하르트는 찻숟가락을 꺼내 찻잔 옆에 둔 후 시선을 다시 라인리히에게 향했다.
“단지… 제가 너무 주사위를 빨리 던졌던 탓인지, 다시 집어 올 수가 없었습니다.”
허탈한 웃음이 리하르트의 얼굴에 번져 갔다. 상황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라인리히는 그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는 이해했지만, 실제로 무슨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어려웠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이라면, 자신이 생각하고 있었던 두 가지 미래에 대한 결론 모두가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습니까.”
라인리히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최악의 결론으로 치닫지는 않는 듯 싶었지만, 대신 더욱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라인리히는 찻잔을 들어 차를 천천히 들이켰다.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혀는 프림이 섞인 커피임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맛만을 전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대신 약간의 선물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라인리히가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 하는 동안 리하르트 역시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약간의 차 맛만을 음미한 채 찻잔을 내려놓은 리하르트의 입에서 의외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녀를 위해서 말이지요.”
밀리어. 그와 자신의 사이에서 그녀라면 잊을 수 없는 이름, 밀리어 홀리워터.
아직 찻잔을 놓지 않았던 리하르트는 달그락 소리를 내며 찻잔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박사님을 위한 선물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우리 모두의 선물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만.”
후회할 수 밖에 없었던 시절. 후회할 수 밖에 없었던 행동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관계.
“박사님과 저, 그리고 밀리어가 이 시대가 아닌 약간이라도 다른 시대 사람이었다면, 이러한 운명으로 마주치지 않았을 텐데… 운명은 언제나 잔혹한 것을 요구하는 모양입니다.”
리하르트의 말은 라인리히의 마음 속 깊이 파고들었다.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면, 그리고 정말 인류에게 닥친 이러한 대사건이 있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조금이나마 셋의 관계를 돌이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인간 관계에 있어서 잠시나마 ‘행복’ 이라는 것을 맛볼 수 있었을 터이고.
라인리히는 아직도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자신과 밀리어에게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시야를 넓게 볼 수 있었더라면 밀리어는 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을 깨달은 것은 리하르트가 자신보다 조금 먼저 밀리어의 곁을 떠난 것을 보고서였다.
“밀리어를 부탁드립니다.”
리하르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말은 간단히 끝났지만 라인리히의 가슴에는 매우 무겁게 떨구어졌다. 결국 자신은 과거의 일을 해결짓지 못한 채 다시금 이 자리에서 무거운 책임을 떠 맡은 것이다. 원래는 그가 짊어졌어야 정말로 그에게 행복했을 일을.
리하르트가 차 값을 계산하고 카운터를 떠나갈 때 즈음, 라인리히는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리하르트를 불렀다.
“아이젠슈타인 박사.”
리하르트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라인리히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 있다고 할 지라도…”
라인리히는 조용하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 부탁은 반드시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리하르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을 지닌 표정이 떠올랐다. 라인리히는 그 표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 또한 그러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박사님을 믿겠습니다. 아니, 사실 제가 믿을 필요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리하르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여 까페테리아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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