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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기/서적

공의 경계 - 1부 -

by 썰렁황제 2005. 8. 24.
  공의 경계를 비로소 완독했습니다. 드디어 '월희' 로부터 시작되어 '공의 경계' 로 끝나는 하나의 작품시퀀스를 완결짓게 되었군요. 이제사 비로소 나스 기노코씨가 원하는 이야기의 방식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다음은 Fate 가 되겠죠.

  이 글은 다소 즉흥적으로 써 내려간 경향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 와서 다시 읽어보니 벌써 몇 개가 보이더군요 ^.^;; 그래서 두고 두고 조금씩 글을 수정할 계획입니다.

  글이 수정되면 이 바로 아래 부분에 수정되었음을 적어두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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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대부분 '월희' 의 내용을 포함하여 '공의 경계' 에 대한 내용누설과 관계가 있으므로 이에 상관하지 않으실 분만 아래부터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의외로 별로 상관없을수도 있긴 합니다만... ^.^;;





  공의 경계 - 경계에서 경계로

2005년 8월 24일 강현신

(1) 소설 내의 세계관 성립 방식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소설상의 세계를 작가가 말하기 위한 주제를 위해 여러 가지 각색 - 변형 - 및 상징의 첨예화를 수행한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례를 들자면, 미카엘 엔데의 '모모' (제가 소설을 몇 읽지 않아서 언급하는 소설의 수가 이렇게 제한됩니다. ^.^) 에서 나타나는 시간에 대한 표현을 보면, 현실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과는 달리 시간이라는 요소에 '형상화' 를 적용하여, 시간도둑들이 생존하기 위해 소모해야 하는 것과 같은 추가적인 개념으로 발전됩니다.
  이러한 방식은 현실의 실질적인 '진실' 과는 관계없이, 작가가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소설상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사실이다' 라고 전제하고 시작한다는 면에서 일반적인 현실중심의 소설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런 이야기는 소설상에서 언급하는 사실 자체가 현실에서의 '진실' 과는 무관하며, 소설 내에서 구축되는 논리적인 전개가 소설상의 세계에서 '진실' 이 되는, 일종의 '닫힌 계' 입니다. (공의 경계를 언급하면서 닫힌 계를 언급하게 되다니, 이 소설은 정말로 '공의 경계' 로군요) 따라서 독자들은 소설의 이야기 전개 자체가 현실의 반영으로서 경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세계라는 하나의 '층' 으로부터 시작되는 가상 공간의 논리로부터 사고 과정의 경험을 얻게 됩니다.
  기존에도 종종 언급했지만, Eternal Dream 이 같은 방식의 전개를 사용했다고 한 이유는 바로 이것으로,Eternal Dream 에서도 '꿈' 이라는 존재를 '에너지' 와 같은 모습으로 형상화를 시켜, 이를 바탕으로 모든 설정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부 설정 문서에는 이를 위한 4가지 가정을 만들고 이로부터 세계를 구성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야기의 특성은, 그렇게 원래의 사실로부터 가정으로 확정되거나 변형된 개념들 자체가 이야기의 주제를 말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는 것으로, 그 때문에 이러한 도구를 몇 가지만 이용해 적용하는 것 만으로도 작가는 독자에게 굉장히 많은 것을 전달하게 됩니다.

  '공의 경계' 의 경우, 이러한 '가정' 과 '개념' 의 세계를 복층적으로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고, 이 때문에 읽기가 다소 난해하다는 점이 있습니다. 가정과 개념으로부터 만들어진 세계에서, 다시 새로운 가정과 개념으로 세계의 현상과 형상을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새로운 가정과 개념으로 구축하고... 이런 방식을 복층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떄문에, 독자는 이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가며 나타나는 사고과정에 대한 경험을 축적하기에 앞서, 일종의 '논리적 패닉'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독자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어디다 두고 이 작품을 해석해야 할 지 난감한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단층적인 개념을 적용한 경우에는, 기저의 가정 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실제의 세계와 비슷한 형식을 가졌고,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 위의 개념에 자신을 위치시켜 이야기를 관측할 수 있습니다. '모모' 를 다시 언급하면, 시간의 '형상화' 와 시간 도둑 자체는 생소하지만, 그들이 존재함으로부터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해서는 자신을 대입시킬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계층이 복잡해지면 독자들은 자신이 어디서부터 관측을 시작해야하는지 난감한 상황에 봉착하게 됩니다.  이러한 복층개념의 가장 극단적 예는 다름아닌 소설상의 주인공, '료우기 시키' 에게서 나타납니다. 책 마지막에서 나타나는 그녀의 복잡성은 그녀의 존재 의의를 현실상의 어디다 두어야 해석할 수 있을 지 굉장히 난감합니다.

  더불어 이러한 개념들을, 사건과 사건의 흐름으로 소설상의 세계에서 독자가 직접 경험하는 것을 통해 해석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각 인물들이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독자는 이러한 소설상의 전반적 개념에 대해 현실상의 경험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이해되기 보다는, 철학책이나 수학논문을 접하는 것처럼 상당히 동떨어진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문제로 깨달은 것인지 아니면 단지 게임에서는 이 구조가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되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설정을 어느 정도 재활용한 '월희' 의 경우에는 이러한 것이 대부분 사라지고, 대부분 단층적인 수준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한편, 개념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도 '알퀘이드 편' 을 제외하면 잘 눈에 띄지 않게 사라져 있습니다.

  이전에 제가 '월희' 를 보며 느낀 것은, 이전에 몇몇 사람들에게 월희에 대해서 설명할 때도 언급했지만, 각 인물들에 대해서 하나의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상징을 배치하여 인물을 만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나야의 시키가 아닌 원래 토오노가의 시키로부터 로어까지로 귀결되는 '死', 알퀘이드로 대변되는 '生', 둘 사이의 경계에 존재하는 나나야의 시키가 대표적인 예였죠.
  '공의 경계' 에서는 '기원' 이라는 설정을 바탕으로 하여 아예 각 인물이 가진 이러한 상징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리오' 는 '먹다'. '시키' 는 '허무', '아자카'는 '금기' 같은 식으로. 만약 작가가 이러한 방식을 월희에서도 그대로 가져갔다고 한다면, 아마도 각 인물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상징쳬계를 그대로 적용시켰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의미는 위에서 제가 언급한 것과 같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방식은 일본의 기존 신세대 앤터테인먼트 미디어 (만화, 애니메이션, SF/판타지 등으로 대변되는) 와는 상당히 다른 (물론 비슷한 방식은 신세기 에반겔리온에서 매우 강력하게 추구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신세기 에반겔리온에 대해서 평을 할 때 다시 한 번 논해보기로 하죠.)  방식이었고, 이 때문에 월희의 경우에는 각 캐릭터들이 이전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캐릭터성, 즉 세계 자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캐릭터성 - 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에 대해서 Newtype 2005년 7월호의 '모에' 관련 특집 기사에서 매우 잘 설명을 하고 있더군요. 관심있으신 분은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 기반이 된 '공의 경계' 자체는 전술했듯이, 복잡한 논리구조와 이에 대한 인물들의 서술적 설명을 바탕으로 한 진행 때문에 캐릭터들에 대한 감정 이입이 쉽지가 않습니다. 특히 료우기 시키는 그러한 현상이 너무 심해서 하나의 캐릭터라기보다는, 세계관을 위한 가정이라는 존재로밖에 인식되지 않는다는 게 무척 큰 걸림돌입니다. 그러한 복잡성 때문인지 월희에서는 이 캐릭터를 완전히 두 개의 존재로 쪼개놓고 그 개념을 굉장히 단순화시켰습니다. 토오노 시키 (그러니까 원래 토오노 가문의 시키) 와 나나야 시키(나나야 가문으로 각성한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야기의 주인공) 로 말입니다.

  아무튼 '월희' 의 성공은 '공의 경계' 라는 소설을 바탕으로 작가가 몇 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이를 보완한 것이 계기라고 생각될 정도로 '공의 경계' 에서는 월희와 비교하여 여러 가지 아쉬움을 남기고 있습니다.

(2) 소설상의 요소들에 대해 다른 작품들과의 비교

  소설의 제목으로 나오는 '공의 경계' 라는 개념은, 적어도 인간에 대해서는 신세기 에반겔리온의 'AT 필드' 와 거의 완전히 동일한 개념입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개념이 같다는 이야기이고, 이를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식은 두 작품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공의 경계가 이 부분에 대해서 신세기 에반겔리온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신세기 에반겔리온은 'AT 필드' 를 통하여 자아의 영역을 정의하고, 이 자아의 영역에 대한 차이를 신과 비교하며 인간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자아의 영역' 은 인간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을 정의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 의미를 '신' 이라는, 자아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존재와 대비시켜 더욱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인간은 신이 '되지 않는다' 고 이야기하고 있지요)
  때문에 이 작품에서는 세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며, 이러한 신과 인간간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이 둘 간의 관계와 차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성서' 를 끌어들입니다. 제목 자체부터 '복음' 으로 시작될 정도로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요소를 차용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실 이 때문에 신세기 에반겔리온을 끝까지 보지 않은 이들이 '반기독교적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대략 난감할 뿐입니다)
  반면 '공의 경계' 는, 가이아 이론으로부터 시작하여 현대 엔터테인먼트 미디어에서는 가장 영향력있게 나타난  '파이날 판타지 7, 10' 에서 언급되는, 세계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인간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아카식 레코드로 대변하는 '기원' 의 언급이 바로 좋은 예이죠. 그러나 중대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전술했던 것들이 인간을 세계의 구성원적 존재로 정의하고 있다면, 공의 경계는 세계의 근원으로부터 발생되는 인간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하면 인간의 육체와 의식과 영혼을 각각 정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서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계' 를 나누는 '공의 경계' 를 언급합니다.
  '공의 경계' 는 따라서 단지 인간간의 경계뿐만이 아니라 좀 더 넓은 범위, 엄밀히 말하면 세계에 존재하는 개념들에 대한 정의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에 관해서는 신세기 에반겔리온의 'AT 필드' 와 동일하고, 인간의 정의에 대해서도 비슷한 방식 (자신을 보는 거울로서 타인을 정의하는 것 등) 을 사용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방향성은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무에서 음과 양을 만들고, 이를 의식세계에 적용해 시키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방식 및, 세계에 존재하는 억지력에 대한 부분은 Eternal Dream 에서 꿈의 세계의 존재에 대한 반작용으로 네메시스 아이덴이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적어도 '공의 경계' 소설상에서 언급된 것만으로 파악한다면 그 논리적 전개의 기저는 다소 다른 데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Eternal Dream 의 경우 근본적인 반작용의 원인은 융의 꿈에 대한 가설을 바탕으로 한, 의식과 무의식의 대립 및 자신의 자아정체성과 관련되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를 '꿈' 의 형상화를 통해 일상 세계의 물질/에너지계에 존재하는 '반작용' 에 대입시킨 것이죠. 반면 '공의 경계' 에서 억지력은 '세계' 나 '인간' 이 각각 무로 돌아가 버리는 것에 대한 저항, 즉 생존 의지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자아 정체성' 과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겠습니다만, 좀 다릅니다. '자아 정체성' 의 소멸은 존재 그 자체의 소멸, 즉 죽음을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소멸을 죽음으로 정의한다는 가정하에서는 죽음이 되겠지요.) 결정적으로 Eternal Dream 의 현상은 그 바탕이 되는 세계가 '꿈의 세계', 즉 인간의 머리 속이라는 극히 제한된 세계 안에서 전개된다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집단 무의식에 의한 억지력 자체만은 Eternal Dream 이나 공의 경계나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죠. ^.^ 다음번에는 '공의 경계가 가지는 의의' 에 대해서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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