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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기/글

하얀나라

by 썰렁황제 1997. 4. 21.

하얀나라

  백지를 보면, 항상 무언가 채우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난다. 그림이든 글이든 심지어는 구김이라도 말이다. 그것은 나의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증거일까, 아니면 텅 빈 걸 못보는 공허공포증같은 증세라도 있어서일까, 그렇지 않으면 불타는 창작욕이 텅 빈 공간을 그대로 남겨놓지 못하게 조바심을 가져다 주어서일까...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하지만, 조금 후 다시 백지를 보게 되면 조금 전과는 달리 그곳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흡사 아무도 밟지 않은 눈덮인 곳처럼, 그 백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것이다. 어짜피 써야 될 종이인데도 말이다. 집앞 현관에 쌓인 눈을 밟지 않고는 나갈 수 없는 것같이...

  눈이 내리고 있다. 사람들은 눈이 쌓인 길거리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구 밟고 지나가고 있다. 그건 나도 역시 마찬가지지만... 눈은 본래의 순수한 색을 잃고 시커멓게 더럽혀져 간다. 사람들은 결백하다는 듯 여전히 발걸음을 옮긴다. 발걸음을 옮기는 게 부담스러운 내가 비정상일까? 하지만, 그 부담스러움은 조금 뒤에 깨졌다. 막 사가지고 나온 A4 200 장이 눈에 젖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짜증났다. 나는 더 이상 백지를 적시지 않기 위해 코트의 품안에다 깊숙하게 종이를 넣었고, 되도록 빨리 집에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눈이 계속 걸리적거린다.

  집에 와서 확인해 본 결과 200장 중 한 20장 정도가 눈에 젖고 들고 오는 길에 구겨져서 못쓰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비닐에 들은 250장을 왕창 다 사버릴 걸... 이라고 후회해 보았자 어짜피 늦은 것이다. 어짜피 막 쓰는 종이이긴 하지만... 어쩄든 백지다.

  펜으로 그림을 그리는 도중 실수하고 말았다. 나는 즉시 화이트를 집어 들고서 그 부분에 비치지 않을 정도로 얄팍하게 칠했다. 얄팍하게 칠했다지만, 말이 그렇지 쉽지는 않았다. 다행히 바라는 대로 비교적 얇게 발라졌고, 나는 화이트가 건조되기를 기다린 후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조금 후 그림은 완성되었다. 어짜피 스캐너로 밀 것이기 때문에 채색은 필요 없었지만, 예상대로 화이트를 칠한 부분이 걸리적거렸다. 멀리서 보면 조금 낫지만 조금만 가까이 대면 티나는 화이트... 같은 백색인데 왜 이리 차이가 나는 걸까? 결국 스캐너로 밀긴 했지만 화이트의 흉터는 남아 다소 귀찮은 수정작업을 거쳐야 했다.

  다른 백색에 비하면 그래픽 작업을 할 때 나타나는 컴퓨터의 하얀 색 화면은 나의 경우 조금 집착이 덜한 편이다. 아마도 밟으면 지워질수 없는 눈이나, 한 번 그리면 꺠끗히 없앨 수 없는 백지와는 달리, 그 원래의 백색을 쉽게 회복할 수 있기 떄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같은 백색인데 그 되돌릴 수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렇게 많은 가치를 띄어야 하는 걸까? 하긴, 가치를 지닐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라는 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 떄문에 그만큼 중요한 가치를 띠는 거니까... 하지만 시간은 대응될만한게 없다. 백색은 대응될 만한게 많다. 그렇다면 컴퓨터 화면의 백색이나 눈의 백색이나 백지나 동일하게 취급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여전히 컴퓨터의 백색 화면보다는 하얀 눈과 백지에 집착이 생기는 것을 막기는 힘들다.

  햇빛보다 하얀 형광등 불빛을 켜고 나는 백지에 눈길을 걷는 그림을 그린 후, 하얀 컴퓨터 화면에 스캐너로 그림을 스캔한 데이터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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